첫 화면 > 에린 도서관 / English
  http://zermoth.net/mabi/library/view/ko/816-001
추억을 파는 잡화상
My little cubic puzzle



세상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 보다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훨씬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 세 갈래 길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 보다는 밟아본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이레흐 언덕의 세 갈래길. 이멘마하에서 던바튼으로, 이멘마하에서 반호르로. 던바튼에서 이멘 마하로, 던바튼에서 반호르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이 길을 밟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갈 것이다. 갖가지 전설이 담긴, 특별한 사연이 담긴 이 붉은색의 나무를. 모두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지나쳐갈 것이다.

"이야. 안녕하세요."

넉살 좋게 생긴 친근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궁색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아 보이는 무난한 옷차림의 사내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 나무 곁을 지나가려던 나에게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네에…. 안녕하세요."

자신을 떠돌이 잡화상이라 소개한 이 남자는 붉은 나무에 기대어 서서 손님을 끌어 모으는 것 같았다. 별다른 호객행위도 없이 좌판도 벌려놓지 않은 채로 손님이 스스로 다가오기만을 기다린다.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디로 가시죠?"

"에- 저- 반호르요."

붉은 나무와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옷. 마치 입고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려는 듯한 다홍색의 옷. 숨막히게 시선을 빼앗아가는 색깔의 남성복. 저 붉은 나무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려나.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띄며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물건을 팔고 계신 거죠?" 그는 솜씨 좋은 요리사가 재주를 부리는 것 같은 솜씨로 상품들을 꺼내 보였다. 나에게는 다소 부담되는 가격의 예쁜 옷이 나오는가 하면 아주 유명한 검객이 다뤘을 법한 무기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는 꼭 상품의 진열을 위한 쇼라도 부리듯, 차례차례로 진기한 물건들을 꺼내 나의 눈을 현혹시켰다.

"와아-"

"멋지죠?"

나는 솔직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장소가 이런 길목만 아니었더라면 박수를 쳤을지도 몰랐을 얘기다. 남자는 시원스런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이 벌려놓은 상품들을 정성껏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물건들은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했답니다."

그는 어쩐지 슬픔이 담긴듯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씁쓸하고 달콤한 맛이 어려있는 레모네이드라도 한 모금 마신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남자가 물건을 정리하는 사이에 내 눈에 오랜만에 보는 것이 딱 들어왔다. 어릴 적에 가지고 놀았을 법한 큐빅 퍼즐은, 어쩐지 닳고 깨진 자국이 있어 애수를 자아냈다.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보려 했지만 나의 손은 떠돌이 잡화상에 의해 그만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 그 퍼즐은 함부로 다루면 큰일나요. 부품 하나가 빠져 있거든요."

남자는 조심스럽게 퍼즐을 들어 나에게 부속이 빠진 부분을 보여주었다. 청색, 황색, 붉은색…. 세 면이 각각의 색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흰색의 면, 검은 면, 녹색의 면은 귀퉁이에 있어야 할 한 개의 퍼즐이 허전하게 빠져 있었다.

"이걸 보니 또 옛날 생각이 나네요."

나는 쿡쿡 웃으며 그에게서 받아 든 퍼즐을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옛날 생각이요?"

"하하. 대수롭잖은 일 이에요."

어린 시절의 나에겐 매우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었다. 둘 다 그 당시 보기 힘들던 사내아이 인지라 나와 친구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친구의 집에는 곰팡이 냄새가 폴폴 풍기는 낡은 창고가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창고에 자신의 보물들을 숨겨놓고는 했었다. 어린아이의 보물이라 해 봤자 썩 대단한 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왜 그러시죠?"

"으-음. 잠시만요."

나는 머리를 싸매며 나의 보물이 무엇 이었는지를 생각하려 했다. 떠돌이 잡화상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엷은 미소를 띄며 걱정하는 투로 말한다. 나는 결국 어린 시절의 내 보물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낼 수 없었다. 친구의 보물만큼은 기억할 수 있었다. 보물이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이것 만으로도 대단한 수확이라 할 만 하다.

"어린 시절 이런 큐빅 퍼즐을 보물처럼 갖고 놀던 녀석이 있었죠."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친구와 헤어지던 날을 떠올리려 했다. 그의 집이 저 멀리 이멘 마하로 이사 간다고 했던 그 날을. 그 시절의 나는 아련하게 먼 도시라고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좀 힘이 들더라도 얼마든지 갈 수 있었는데. 괜히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나는 회상을 재개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잊고 있던 무언가도 생각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휘잉-

바람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뺨을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듯 어린 시절의 일이 불현듯 떠오르기 시작한다. 떠돌이 잡화상은 싱글 웃으며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한 조각이 빠진 큐빅 퍼즐이 들려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저 큐빅 퍼즐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모처럼 한 줄을 맞추면 다른 한 조각이 저만치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야속할 수가 없었다. 큐빅 퍼즐을 무척이나 잘 맞추던 내 친구는 그럴 때마다 나를 비웃곤 했었다. 나는 몰래 친구네 집에 찾아갔다. 친구에게 인사도 없이 창고에 틀어박힌 나는 이리저리 흐트러진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의 오기가 쌓여있던 것이 그제야 분출된 것이다. 비웃는 친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왜 그랬을까요?"

떠돌이 잡상인은 그저, 가벼운 미소를 유지한 채 어깨를 으쓱일 뿐 이었다. 바람이 선선한 것이 아주 좋았다. 그는 살며시 큐빅 퍼즐을 나에게 다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이 행여 부서지지 않게 조심조심 받아 들고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살짝 한 바퀴를 돌렸다. 퍼즐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대체 친구는 어떻게 이런 퍼즐을 잘 맞출 수 있었던 것일까? 어린 나는 애꿎은 그를 원망하며 퍼즐을 힘껏 집어 던졌다. 한숨을 쉬며 돌아가려는 찰나에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집어 던진 퍼즐을 다시 주워 들고 퍼즐 조각 사이에 난 틈에 작은 쐐기를 끼워 박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쐐기를 지렛대 삼아 퍼즐을 분해했다. 이윽고 한 조각이 빠지고 와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큐빅 퍼즐이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성공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마도 그런 환호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그리고는 신이 나서 색깔별로 퍼즐을 맞춰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발생해 버렸다. 다 맞추긴 맞추었는데 한 조각이 어디론가 굴러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퍼즐을 푸는데 들인 시간보다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는 시간에 더욱 많은 시간을 쏟았다. 하지만 큐빅 퍼즐의 잃어버린 한 조각은 찾아낼 수 없었고, 나는 다음날 친구에게 사과해야만 했었다. 친구네 집은 얼마 뒤, 이멘마하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한 조각이 빠져있는 큐빅 퍼즐의 빈 공간에 엄지 손가락을 집어 넣어 보았다. 굵은 손가락이 채 구멍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거, 사실 건가요?"

떠돌이 잡화상의 그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큐빅 퍼즐을 풀만한 나이도 아닌데, 이제는 못 쓰게 된 퍼즐일 뿐인데.

"얼마죠?"

떠돌이 잡화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팔지 않겠다는 뜻일까? 나는 체념하고 큐빅 퍼즐을 돌려주고서 돌아가려 했지만 그는 나를 만류했다.

"아뇨 아뇨. 돈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 물건은 파는게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자신의 장사용 가방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쥐었다. 큐빅 퍼즐을 든 내 손 위에 작은 조각 하나가 툭 떨어졌다. 흰색, 검은색, 녹색 면의 큐빅 퍼즐 조각이었다. 나는 조심조심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면을 귀퉁이에 끼워 맞췄다. 원래부터 그것의 부품이었다는 것처럼 끼기덕 소리를 내며 퍼즐은 잘도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하, 재밌네요."

"그러신가요?"

"왜 잊고 있었을까요. 퍼즐을 다 맞췄다는 것 보다 퍼즐을 맞추면서 애쓰는 것이 재밌는 것이었다는 걸."

그는 후후 하고 웃으며 자신이 기대고 있던 붉은색의 나무를 매만졌다. 어느 드루이드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 영주의 아내가 몸을 바친 것이 나무가 되었다던 사연 깊은 나무를….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죠. 그리고 그 일들 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공기처럼 당연한 일도 있어요."

그는 거기서 한번 우거진 붉은 나뭇잎을 올려다 보았다. 정말 한 명의 단아한 여성처럼 아름다운 나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당연한 일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바꾸기도 하고 자연스레 기억 속에 묻어 두기도 해요. 이상하죠?"

추억이라…. 나는 그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얼마나 많은 당연한 일 들이 사라졌을까. 얼마나 많은 당연한 일 들이 추억으로 바뀌었을까.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반호르로 향하는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나에게 판매한 작은 추억은, 내 손에서 끼기덕 끼기덕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바쁘게 회전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