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zermoth.net/mabi/library/view/ko/818-003
캠프파이어 Campfire
이 검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잊어버린지 오래다. 지친 팔로 겨우 검을 거두었을 때 멀리서 작은 노래 소리가 들렸다.
"지는 석양에 사랑을 더하고, 뜨는 아침 해로 인생을 보았어요.
꿈을 쫒는 사람에게 쉴 곳은 없는데, 무엇을 원해서 방황하나요?"
일행이 아니어도 불문율처럼 모여든다. 거리낌없이, 자연스럽게. 모르는 사람과 앞뒤 사정 설명 없이 마주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보잘 것 없이 작은 모닥불의 온기와, 모여든 몇 명의 체온으로 더 따뜻한 밤이 된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온기는 나누어, 푹신한 침대가 아닌 곳에서도 휴식을 얻는다. 어색하지만 따스하게 나누어주는 빵 조각에 작게 미소 짓고, 말없이 내미는 치료의 손길에 비로소 또 하나의 인연을 만든다.
"부쩍 해가 짧아졌군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긴 흑발을 목덜미에서 느슨히 묶은 예쁜 아가씨가 나뭇가지를 불 속에 던져 넣으며 동년배로 보이는 긴 검을 둘러멘 청년에게 말을 건넸다. 가장 쉽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화제는 언제나 날씨와 계절에 대한 것이다.
"예..."
"어디로 가시나요?"
"..."
"고향을 떠난지는?"
"반 년 쯤..."
"두고 온 여자라도 있나봐요?"
"아, 아니, 뭐... 하하하."
붙임성이 좋은 이 아가씨는 마법사다. 손가락을 튕겨 작은 불덩이를 더 일으켜 띄운다. 따뜻함을 더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언제 저 풀숲에서 늑대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호르르, 흰 입김을 내쉬며 그녀는 무릎을 그러모았다. 그녀는 밤이 좋았다. 마나의 흐름을 익힌 마법사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은 그저 단순하게 올빼미 형인지도 모른다. 이웨카는 어떻게 마나의 흐름을 만드는 것일까. 그녀는 언제나 궁금했다.
"이웨카는 뭘로 만들어졌을까? 마나 허브? 파란 포션? 이웨카 전체에 스마트 스크롤이 인챈트 되어있는 건 아닐까?"
"보통 여자애들은 바다나 토끼가 있을까 궁금해 하지 않나."
"달은 그냥 하늘에 떠 있는 돌일 뿐이야. 게다가 말야, 있더라도 쥐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왜 꼭 토끼지?"
"삭막하긴... 너한테 달은 그냥 '충전기'지?"
그렇게 마나가 넘치는 밤에는 그에게서 마법을 배웠다. 새 주문을 익히는 배움의 기쁨에 작은 설레임이 몰래 더해져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희미한 달빛에 글자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선명히 읽을 수 있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사랑의 고백이 아닌데도, 낮게 주문을 읊는 목소리에 괜시리 얼굴이 붉어져 어두운 밤인 것에 감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웨카가 밝던 어느 날 밤, 그는 그렇게 '달의 바다'로 떠나 버렸지. 어느 옛 이야기처럼.
아 - 이런 생각은 이제 안 하기로 했는데.
괜시리 가슴께의 리본을 만지작거린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어린아이 같은 옷을 입고 있냐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커다란 리본에 짧은 플리츠 스커트, 언더 니 삭스. 안 어울릴만도 하다. 사실 단정한 수트 같은 것을 입어야 할 나이가 아닌가. 단순히 이 귀여운 옷을 입고 싶어 마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하면, 지금 이 시간에도 머리를 싸매고 코피 흘려가며 주문을 익히고 있을 마법사들에게 미안한 일이 되겠지. 그녀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하지만, 여자란 그런 거야. 그리고 이제는 어울리지 않는 이 낡은 옷을 벗지 못하는 것 역시... 여자이기 때문이지.
"왜... 웃습니까?"
"예? 아 - 아뇨, 그냥 잠깐..."
"마법사들은 정신세계가 특이하다더니 정말이네, 언니."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를 날려버린 것은 맑은 목소리였다. 막 따온 듯한 나무 열매를 한아름 품에 안은 작은 소녀가 다가왔다.
"요 꼬마가, 혼날래?"
"에헤헤헤 - 언니 옷 예쁘다. 정신세계가 좀 이상해도 예쁘니까 봐주지, 뭐."
소녀는 나무 열매를 와르르 쏟아놓으며 마법사 아가씨의 옆에 주저앉았다. 아이 특유의 발랄함에 순식간에 분위기는 바뀌었고, 그녀는 다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은 시큼한 열매의 향기에 약간의 그리움을 느끼면서.
"자, 선물."
"교복...?"
"더 깊은 내용은 학교에서 배우는 게 좋을 거야."
"왜? 이제 안 가르쳐 주는 거야...?"
"달에는 바다가 있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후후후..."
"언니... 정말 이상하네..."
마법사 아가씨의 뜻 모를 미소와 윤기나는 긴 머리칼을 바라보며 청년은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친구를 생각했다. 그녀도 저렇게 까맣게 빛나는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먼 훗날 티르 나 노이를 강림시킨 어느 용사의 전설이 만들어진다면, 그 이야기에 대사 하나 둘 뿐인 단역으로 등장하는 '마을아가씨A'가 되고 싶다'던 희한한 소녀. 모두가 쉴새없이 달리려 애를 쓰는 이 시대에, 한 곳에 멈춰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싶다던 그녀는, 지금쯤 고향에서 어떤 하늘을 보고 있을까. 같은 별을 세고 같은 달빛을 받으며 주고 받았던 이야기는 이제 먼 추억이 되어 버렸다. 나는 달리고, 그녀는 서 있다.
"그 아가씨, 나만큼 예쁜가요?"
"예에?"
넋을 놓고 마법사 아가씨를 바라보던 청년은 그제사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쿡쿡 웃었다.
"이봐요, 거 아가씨가 미인이긴 한데, 너무 자신있는 거 아니오?"
"아하, 그랬나요?"
껄껄 웃는 중년의 남자. 연륜있어 보이는 레인저다. 정성스레 손질하던 석궁을 옆으로 비껴놓고 작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는 점잖게 말했다.
"모름지기 미인이란 말이 없는 법이지. 그렇잖은가, 청년?"
"아, 예. 하하하."
"그래서, 어떤가? 자네 연인은 저 아가씨만큼 미인인가?"
"예, 예에...?"
"와, 아저씨 최고 - "
수줍음이 많은 듯 청년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타오르고 있는 불꽃만큼 붉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만큼 붉은 얼굴을 하고서 청년은 '저 아가씨만큼의 미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향의 소녀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말은 꼭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 그녀는 그 눈으로 말했고, 그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는 내 손길로 대답을 들었고, 우리는 헤어졌지.
그녀의 바람을 알기에 함께 가자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달리는 자들의 모습을 살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것이 자신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너무나 커다란 자만이다.
"이 오빠 얼굴 빨개진 거 봐."
"자네는 아직 너무 젊군."
"예?"
깊은 생각에 젖어있던 청년은 중년 사내의 갑작스런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사내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은빛 갑옷 번쩍이는 기사가 되고 싶은가? 강인한 눈매와 짧은 브레이드가 포인트인 미남 기사님이? 그러지 않으면 그 처녀는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표정이군. 오... 좋지, 좋아. 번쩍이는 갑옷을 걸치고 붉은 망토를 뒤로 늘어뜨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마이 페어 레이디 - 당신을 위해 세계를 구하고 돌아왔소', 이것이야말로 용사님의 로맨스. 허허."
일부러 극적인 어조를 곁들인 사내의 이야기에 청년은 얼굴을 더 붉혔고, 소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여자들이란 다들 그런 이야기를 꿈꾸는 법이지만, 하며 사내는 이야기를 짧게 끝냈다.
"죽지나 말게."
진실한 말은 단호하고, 짧고, 차갑다.
"그게 그 처녀의 소망일세. ...그나저나, 날이 춥구먼."
"불을 좀 더 피울까요? 어디보자, 나무가..."
"나 키트 있어, 언니."
"요 꼬마 제법인데?"
지나가는 농담이었다는 듯이 은근히 끝내버린 이야기는 새 모닥불의 분주함 속으로 사라진다. 청년은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다시 한 번 그녀를 떠올렸다.
근사한 기사님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쯤은, 사실은 알고 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은 나일 거라는 것도.
"조심해서... 잘 다녀와."
"...미안."
타닥타닥, 온기를 더해 높아지는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에 맞춰 꼬마는 류트를 꺼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얼굴 빨간 오빠에게 한 곡, 이라고 윙크를 날리 것을 잊지 않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그대의 목소리 들을 수 있게
내 귀는 그대 소식 전해주는
서풍에 열려 있으니
작은 목소리라도
내 이름을 불러주오
지금이 이 현실이
깨어나지 않는 꿈이라 해도
당신과 함께 있는 현실이
이 꿈 저 편에 있다면
나 기꺼이 꿈에서 깨어나
그대 곁으로 가리다
이 캠프의 불꽃이 사그라들면
이 캠프의 불꽃이 사그라들면...
손가락이 짧아 류트의 현에 채 닿지 않아 나는 불협화음 쯤은 귀엽고 맑은 목소리로 용서해줄 수 있을 듯 하다. 짝짝짝. 중년의 사내는 다시 한 번 껄껄 웃으며 박수를 쳤다. 꼬마는 장난스럽게 옷자락 한 쪽 끝을 들어올려 우아하게 인사하고는 생긋 웃었다. 그 천진난만함에 사내는 고향에 두고 온 딸을 생각했다. 가장 최근 집을 들렀을 무렵 한창 말을 배우던 아이의 모습이 겹쳐져 사내는 흐뭇하게 웃었다. 무작정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슬퍼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오랜 모험과 그리움이 겹겹이 쌓인 그의 인생에서 얻은 교훈이다.
이 청년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젊음의 치기에 허덕이고 있던 철없는 자신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은 -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옛 동료.
"여신을 알고 있습니까?"
"예...?"
그 사람에게서는 물질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잔뜩 배웠다. 이 세계의 여신을 바르게 믿는 법, 올바르게 사랑하며 올바른 모험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법까지. ...그리고 너무나 무거운 책임을 떠맡았다. 남겨진 인연과 마음, 그리고 함께 꾸었던 꿈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 되었고 커다란 가르침은 무거운 그리움과 같은 크기가 되고 말았다. 배운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올바른 사랑을 알게 되기까지 힘겹고 긴 시간을 보냈다. 결국, 시간이 흘러 상처입는 만큼 경험을 쌓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 고 겨우 깨달았을 때 끝없이 무겁기만 했던 책임감은 바른 사랑이 되었고, 어느덧 딸의 웃음에 어쩔 줄 몰라하는 팔불출 아버지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늘 가족을 두고 정처없이 나돌아다니는 나쁜 아버지가 되고 말았지만.
"아빠, 다녀오쪠요."
"어이구, 우리 딸 - 뭐 사다 줄까?"
"류트! 나도 옆집 언니처럼 노래배우고 싶어!"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의 목표는 단 하나.
지켜야 할 것이 생긴 자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사내는 웃으며 소녀의 벗어놓은 모자 속에 금화를 하나 던져 넣었다. 딸에게 사다 줄 류트는 저 소녀처럼 푸른색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훌륭한 바드의 노래를 들었으면 사례를 해야지."
"우와 - 고마워요, 아저씨."
"아니, 난 정신 세계가 특이해서 그런가 별로 좋은지 모르겠네."
"언니!"
"아하하하."
"잘 들었어요."
중년의 사내가 건네준 한 닢의 금화를 손에 쥔 채로 깔깔 웃는 그녀는 아직 한참 어린 소녀다. 두 손에 쥐면 쏙 들어오지 않을까 싶을만큼 작은 소녀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당돌하다.
"그건 그렇고, 꼬마는 왜 맨발이니?"
"가난해서요."
소녀는 장난스레 대답했다. 홀로 에린을 걷기에는 너무나 작은 몸집을 한 소녀는 옷은 제대로 갖춰입고 머리에는 세모진 작은 두건도 둘렀음에도 발만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그냥 맨발이었다. 희고 작은 발.
"우리 꼬마 아가씨, 혹시 숲에서 몰래 나온 임프 아니신가? 꼭 요정 같구먼."
"와아, 그래보여요?"
"똑같네 똑같아, 조그맣고 버릇없고 - "
"언니는 정신세계가 이상한 마법사라 내 매력을 모르는 거야."
"아하하하하."
아무 것도 신지 않은 흰 발. 소녀는 다리를 조금 움직여 불을 가까이 쬐었다. 따뜻했다. 신발을 신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할 여러가지 것들을 알 수 있다고, 소녀는 속으로 대답했다. 조금 추운 것과 아픈 것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꼬마 혼자 힘들지 않아?"
"엄마가... 이 에린에는 평생 모아도 못 모을 만큼의 행복이 넘치도록 있댔어. 그러니까... 혼자라도 힘들지 않을 거라고..."
"..."
"에이, 아저씨가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엄마 말대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고, 나는 행복해. 발로 밟는 것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을만큼."
"...그렇구나. 그래도 혼자 맨발로 걷기엔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난 어린 게 아니라 작을 뿐이야, 아저씨."
"아하하, 그렇구나..."
소녀는 '얼굴 빨간 오빠'와 조금 닮은 것도 같은 소녀의 친구를 떠올렸다. 홀로 이 세계로 뛰어들어 처음으로 만났던 친구. 키가 훤칠하고 늘 수수한 긴 로브를 입고 있던 청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녀의 이야기에 대신 침울해하며 억지로 웃음짓던 그의 표정을 떠올리자 조금 우스워졌다.
"...노래, 불러 줄까?"
"응."
아이의 서투른 허세가 담긴 연주를 잠자코 들으면서 그는, 가만히 웃었었다. 연주를 마치면 꼭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가끔은 안아올려 무등을 태워주었다. 소녀의 발을 쥔 손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커다랗고 따뜻해서 잠이 쏟아지곤 했다. 이 새까만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버렸으면 좋겠다 - 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높아, 이 사람은 키가 크니까. 별이 보이지 않냐며 그는 말했고, 팔라라가 이렇게 뜨거운데 무슨 별이냐며 소녀는 핀잔을 주었다. 그런 때의 하늘은 아름다웠고, 그는 조금 슬퍼보였다. 이 사람은, 나를 대신해서 슬픔을 느끼고 있는 거라고 알 수 있었다.
맨발 끝으로 여과없이 느껴지는 에린의 행복은 발에 채일 만큼 많았고, 소녀는 걸으면 걸을 수록 여신의 사랑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축복을 깨달을 수록 점점 더 지울 수 없게 되는 것은, 이 행복한 에린을 차마 다 밟아보지 못한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이 세상은 너무나 행복하기에 그 그리움에 눈물 흘려서도 안된다는 모순된 서글픔. 잔인한 축복을 너무나 일찍 - 아프게 깨달아버린 맨발의 자신을 대신해서 슬퍼해주었던 그녀의 첫 친구는 그렇게나 멋진 사람이었다.
"요 꼬마, 갑자기 조용하네?"
"으응? 왜? 으엑, 뭐하는 거야 언니 - "
"잔말말고 입어! 애 주제에 이런 밤에 그렇게 얇게 입으면 감기 걸리니까."
"꼬마 아가씨, 한 곡 더 불러봐요."
억지로 입혀진 밝은 빛의 로브는 꽤 따뜻해서, 마음에 들었다.
...소녀는 다시 류트를 켜기 시작했다.
"아저씨, 엄마라고 불러도 돼?"
"나 남자인데..."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고 류트의 선율이 깊은 밤하늘로 녹아든다.
난방 설비가 잘 되어있는 아늑한 여관은 아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고 찬 이슬이 내리는 밤, 고작 장작개비 다섯 개로 지펴지는 작디작은 불이지만, 모두 더할나위 없는 온기를 느끼고 나눈다. 작은 빵 조각도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되고, 작은 불씨도 팔라라만큼이나 커다랗게 타오른다.
붉게 타오르는 그 속에서 꿈을 보았고, 미래를 보았고,
과거와, 과거의 그리운 이를 보았다.
"인사는 하지 않을 거야."
"달에 갈 수 있을까?"
"다녀오세요!"
"어때? 별이 보이니?"
상상했던 미래와는 다른 현실에 상처입고 과거에의 그리움에 비틀거리며 혼자 걷는 에린의 하늘 아래에서, 모닥불이 있는 밤만큼은 마음을 기댈 곳을 찾을 수 있다. 그리움과 허세를 잠시 내려놓고 여린 마음을 조금쯤 털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 지친 밤의 한 구석을 작은 불로 밝히고, 작게 웅크린 어깨를 서로 기댄 채 소근소근 이야기 소리에 마음을 채우는 시간.
차가워진 손을 조금 내밀어 불빛에 적시면, 류트의 현과 밤바람의 화음에 귀를 기울이면 - 이 불 맞은 편에 앉은 사람에게, 이 밤만이라면 - 잠시 마음을 맡겨둘 수 있을 것 같다.
"나만큼 예쁜가요?"
"한 곡 더 불러 봐요."
"용사님이 되고 싶은가?"
"언니... 이상하네."
작디작은 모닥불이지만 지친 마음을 기대기에는 더없이 충분하다.
같은 온기에 같은 감정을 나누어 같은 꿈을 꾼다.
캠프 파이어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이웨카가 사라지고 조금은 추운 아침 이슬이 내릴 때 - 푸른 번개의 지저귐이 들려올 때쯤이면,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되고 타인이 되어 돌아선다. 털어버리고 싶었던 무거운 그리움은 짧은 밤 잠시 기대었던 것만으로 다시 소중한 추억이 되고, 달릴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리고 푸른 이웨카 아래 다시 한 번 그 작은 불이 지펴질 때, 하나의 옛 그리움 위에 하나의 새 추억을 쌓아 올릴 것이다. 그리움에 추억이 더해질 때 우리는 한 걸음 성장하고, 다시 한 번 인연의 선을 긋는다.
모닥불에 손을 펼칠 수 있는 밤이 돌아올 때까지, 조금쯤은 - 지쳐도 괜찮다.
"아튼 시미니의 축복이 있기를, 안녕히 - ."
"나 기꺼이 꿈에서 깨어나 그대 곁으로 가리다.
이 캠프의 불꽃이 사그라들면..."
- fin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