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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드 숲의 잊혀진 전설 The Forgotten Legend of Fiodhe
목차
1. 서문
2. 요정과 기사
3. 전쟁의 종결과 인간의 배신
4. 루의 실종
5. 그 뒤의 이야기
6. 맺음말
1. 서문
피오드 숲의 봉인이 한 명예로운 자에 의해 깨어진 지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나 막상 문이 열린 피오드는, 우리가 알던 그곳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나무와 요정들이 춤추던 신비로운 숲은, 몬스터와 마족으로 가득찬
무서운 미로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피오드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봉인석이 깨짐으로써 인간의 명예를 되찾았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이렇게 바뀔 피오드의 모습을 숨겨두기 위한 것일 뿐이었단 말인가.
요정의 호의를 저버리고 약속을 어겨 어머니 나무를 베어버린 인간의
어리석음은 아직도 용서받지 못한 게 아닐까.
피오드와 깊은 관련을 가졌던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정들과 피오드 숲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당했던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많은 걸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보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 요정과 기사
센 마이의 평원에서 마족과 인간이 격전을 거듭할 때에, 패색이 짙어져가는
인간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뛰어난 기사가 한 명 등장했으니, 그의 이름은
루 라고 했다.
그는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은빛으로 빛나는 창을 든 기사였는데,
그 싸우는 모습이 어찌나 용맹하고 아름다운지 사람들은 그를 빛의 기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에 관하여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으니,
누구도 그의 출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귀족집의 자제도, 왕가의 혈족도 아니었던 젊은 기사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묻는 말에 언제나 조용히 미소짓기만 할 뿐이었다.
궁금해 하던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아름답고 신비한 이 기사에 대해
신이라던가 요정이라던가 하는 이름을 붙일 때에만,
자신의 성장이 평범하지 않을 지는 몰라도 자기는 모두와 똑같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많은 격전을 거듭하던 전쟁은 결국 인간의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그대로 멸망당할 수는 없는 법. 모리안 여신의 희생으로 겨우
전선에서 빠져나온 인간들은 크게 양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들은 포워르의
추적을 피해 북쪽과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 중 한 쪽을 이끌던 것은 바로 빛의 기사 루였다. 루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피오드의 숲으로 들어갔다. 당시 피오드의 숲은 요정들이
사는 숲으로 알려져 인간들이 쉽사리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소규모의 인간들이라면 요정들의 허락을 얻어 숲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나무를 베기도 했지만, 일찌기 이토록 대규모의 인간이 숲을 방문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루는 피오드 숲의 입구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말은 요정의 말이라
알아들은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숲의 주민들은 그 말에 호응하여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다.
그곳에는 인간들이 일찌기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요정과 정령들이 가득했다.
루는 그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키가 크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요정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인간들에게는 요정들의 여왕이라고 알려졌는데,
그녀의 본디 이름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와 같이 청명하고 아름다웠으나
루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인간들은 그녀를
요정을 뜻하는 '시오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미 과거 파르홀론 족의 과오로, 요정들은 인간에 대해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피오드의 숲에 인간들이 쉽사리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러나 투아하 데 다난의 대표로 나선 루의 설득에 의해 시오라는 새로운 인간들을
믿어보기로 결정했다.
다만, 시오라는 수 많은 인간들을 숲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한 가지 약속을 지키도록
맹세하길 요구했다. 그것은 바로 숲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어머니 나무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 루는 인간을 대표해 그들에게 맹세했고, 자신이 이끌고
온 사람들에게 절대로 어머니 나무를 건드리지 않을 것을 명령했다. 사람들은
모두 기꺼이 그 말에 동의하였고, 피오드 숲은 포워르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요새로 변화했다.
3. 전쟁의 종결과 인간의 배신
인간들은 도피처에서 차근차근 힘을 키웠다. 목숨을 건 특공대가 조직되는 사이,
루는 최전선에 나가서 마족들의 전진을 저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낭보가 전해져왔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에 의해
거두어진 승리 뒤에는, 만신창이가 된 토지를 재건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루는 피오드 숲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인간의 부흥을 위해 힘썼다. 피오드 숲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숲을 개간해서
점차 주변을 살기 좋은 땅으로 바꿔갔다.
그러나 어느 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위기에서 벗어난 인간의 안이함이었는지,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는 어리석음이었는지, 인간들은 자신들이 요정의
허락을 얻어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숲 속 곳곳이 베어지고 황폐해지는 것을 불안히 바라보던 요정들을 크게 배신하는
행위가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루와 시오라의 맹세를 지켜보았던 인간들이
그의 부재를 틈타, 숲 한 가운데 위치하던 어머니 나무를 베어버렸던 것이다.
요정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시오라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자신에게 약속했던 루의 이름을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대지에 떨어지자 그것은 곧 인간에의 저주로 바뀌어
사람들을 몰아냈다. 순식간에 자라난 나뭇가지와 뿌리는 인간들이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틈새로 파고들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길을
잃고 헤매거나 숲 밖으로 쫓겨나 버렸다.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보호해주던 견고한 나무 성채는, 눈깜짝할 사이에
인간을 몰아내고 죽이는 저주의 숲이 되어버렸다.
4. 루의 실종
이 사실은 수도에서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있던 루의 귀에도 들어갔다.
피오드 숲이 닫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루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크게 탄식하더니, 왕위도 부하들도 버려둔 채, 자신의 왕위를 이양하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남긴 업적을 칭송하며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했지만
루는 다시는 인간들에게 돌아오지 않았으며, 왕국은 다시 평범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피오드 숲의 저주에 관해서는
이미 나도 잘 알고 있는 터인데, 어째서 이러한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느냐고.
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 이야기에는 숨겨진 전설이
포함되어 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느냐고.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5. 그 뒤의 이야기
인간들이 피오드에서 떠난 지 얼마가 되었을까, 그 주변에서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하고
초췌한 로브를 걸친 젊은 청년을 발견한 자가 있었다. 그 청년은 피오드에
관련된 두려운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는지,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숲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분노한 숲이 그를 밀쳐내고 동물들이 그를 습격하려 할 때,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요정의 말을 하며 자신의 하얀 갑옷을 드러내었다. 눈부신 하얀 빛을 띤
그 갑옷은 달빛을 뭉쳐서 만들어진 것처럼 아름다워서 바라보던 자의 눈길마저도
한순간 아득해질 정도였다. 잠시동안 숲을 향해 서 있던 그는 크게 탄식하며
인간의 말로 중얼거렸다.
더 이상 인간의 승리는
어떤 명예도 되지 못하고,
깨어진 맹세만이
부서진 칼날처럼 심장을 파고든다.
그대가 축복한 이 갑옷을
입을 자격이 없으니
청결하고 신성한 모든 것은
숲으로 돌아가리라.
그 말과 함께 갑옷은 새벽의 안개처럼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것을 바라보던 금발의 청년은 비통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의 표정은 이 세상의 어떠한 비극보다 슬퍼,
바라보던 자의 눈에서도 절로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나뭇가지들이 움직이며 버석거리더니,
청년을 마치 숲 안으로 안내하는 듯 숲이 좌우로 파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열린 길 안쪽에서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서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누구인지 바라보던 자는 알 수 없었지만, 피오드 숲을 다스리는
정령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금발의 청년은 그대로 숲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바라보던 자가 당황하여
그를 불러세우려 했으나 이미 그의 모습은 숲 안으로 삼켜졌고,
활짝 열려있던 길은 눈깜짝할 사이에 거짓말처럼 본래대로 그 입을
다물었다.
6. 맺음말
나는 이야기를 끝마친 사람에게, 그 금발의 청년을 발견한 것이
이야기한 사람 본인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상당히 나이가 들어보였고, 모이투라의
끔찍했던 전쟁 시절에도 살아있었을 만큼 늙어 보였다.
그는 딱히 긍정하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숲 앞에서 탄식하고 있던 아름다운 청년이, 바로 실종된 빛의 기사 루라고
생각되지 않느냐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사죄만을 위해 달려온 그의 정성과 슬픔을, 숲의 요정이
받아들여준 것 같지 않느냐고.
마지막으로 피오드 숲에 받아들여진 아름다운 청년의 이야기는 나에게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졌다. 그가 루였든 루가 아니었든 간에, 그의 진심이 숲에도 통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믿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역시, 피오드 숲이 아직도 닫혀있는 것은
그와 같은 깨끗한 영혼의 인간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피오드 숲의 요정들을 배신한 것은 분명히 인간이다. 신뢰를 저버리고
추악하고 거짓스러운 면을 드러낸 것도 물론 인간이다. 하지만, 성스럽고
고귀한 빛의 기사 루 역시 자기 자신을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명예로운 자만이 그 문을 열 수 있다는 피오드의 봉인은, 결국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진정한 명예를 아는 자라면, 지난 날의
과오를 알면서도 자신의 명예나 지위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축복받았던 자신의 갑옷마저 벗어 던진 젊은 청년 -
아마도 루라고 생각되는 그의 고결한 용기와 선함이야말로 진정한 명예로움이 아닐까.
어떻게 깨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피오드의 봉인석을 깬 자가 홀연히 나타났던 것처럼,
누군가가 나타나서 루의 이름을 이어 인간의 선함을 대표해줄 자가 되어준다면
그때야 진정으로 요정의 분노가 풀리지 않을까.
최근에 피오드 숲에 들어간 사람들 중,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의 환영을 본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요정들을 배신했던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고
다시 한 번 사죄할 기회를 주기 위해 나타나는 루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이 책을 쓴다.
나 역시 나이를 먹어 더 이상 피오드를 열기 위해 노력하긴 힘들지만,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루의 환영을 만나러 갈 수 있다면
우리 세대에서는 해내지 못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남편과 나를 거부했던 아름다운 피오드 숲의 길이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인간들에게 열리기를 기원하면서 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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